洪 範 圖

홍범도 장군 이야기

전설의 영웅 홍범도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항일무장 독립투쟁으로 일관되었던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장군의 삶은 긴장과 걱정, 궁핍과 위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조실부모한 가난한 평민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그에게 세상은 천대와 괄시, 학대와 무시만을 안겨주었다.
봉건의 한 시대가 저물고 근대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전환의 공간 조선. 혼란의 틈에서 누군가는 부정과 손잡고 자신만의 안락함을 이어가려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으려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고 했지만 본성이 정의롭지 않았다면 영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부패한 군인, 지주,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고, 제국주의의 야욕을 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 그가 바로 전설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다.

신장이 190cm에 이를 만큼 장대했던 그를 사람들은 ‘구척장신의 장군’이라 불렀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숱이 많은 눈썹과 수염을 가진 그는 항상 군복을 입었고, 총과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녔다. 총은 군인의 상징이었고, 자신의 삶을 무장투쟁에 바치겠다는 약속의 징표였다. 수첩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생사를 달리했던 전우들의 이름이나 전투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전우들을 잊지 않겠다는 그의 마음이었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말겠다는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정의로웠다. 주어진 삶의 테두리 안에서 어울렁더울렁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자유와 평등의 싹 튼 조선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은 과거의 잔재가 되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부패하고 단죄되지 않는 잘못은 반복됨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상의 저항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제는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분연히 일어나 의병 투쟁을 시작했다. 세 번의 전투는 모두 패했고, 정의감만으로 적을 무찌를 수 없음을 실감한 그는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데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자신에게는 더없이 냉철했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기술은 삶을 유지시켜주는 든든한 무기였다. 사격술이 그에겐 그랬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화승총 한 자루가 밑천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쓰러뜨리고 총을 빼앗아 의병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독립군들에게 탄약없는 총은 때로는 짐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을 소중히 했고, 사격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립전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위상을 확인시켜주었고, 독립 쟁취를 향해 굽히지 않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준 홍범도 장군. 하지만 전투라는 것이 매번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 아니었다. 승리했다 하더라도 함께 싸웠던 동지들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며 가슴에 묻어야했던 일도 많았다. 그는 군림하지 않는 장군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부하들에게 먼저 먹였고, 군자금이 필요할 때는 솔선수범하여 노동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부하들은 언제나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나보다.

평생 전장을 누빈 홍범도 장군도 한 사람의 남자였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삭발승으로 살고 있을 때 단양 이씨를 만났다. 청춘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여인을 보며 그는 평생을 함께 해도 모자람이 없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길에 그들은 건달패를 만나 곤혹을 치르고 헤어졌다. 서로가 죽은 줄만 알았는데 몇 년 뒤 극적인 재회를 하였다. 운명이었다.
그녀는 홍범도 장군을 처음 보았을 때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제대로 된 혼례도 올리지 못한 채 아이를 갖고 험난한 길을 돌아 고향인 북청에 자리잡은 그녀는 홍범도 장군을 빼닮은 아들을 낳았다. 아비없는 아이였지만 바르게 키우려 노력했다.
1907년 홍범도 장군은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후치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본군의 목을 조여갔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들은 그의 아내를 볼모로 잡아갔다. 홍범도 장군을 회유해 오라고 온갖 고문으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비열한 일본군들을 단호하게 꾸짖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그녀는 홍범도 장군의 아내다웠다.
그의 큰 아들 양순도 일본군의 회유에 떠밀려 아버지에게 투항을 권유했지만, 의병대장인 홍범도 장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인 자신에게 총을 겨눌 만큼 올곧은 아버지를 보며 그는 더 없이 자랑스러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의병투쟁을 했고, 열 여섯이란 어린 나이에 전사한 양순은 그렇게 아버지 홍범도의 가슴에 묻혔다.
작은 아들 용환도 아버지를 닮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형이 죽은 후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향한 용환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변 한인마을에서 병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간도참변 때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건 아내와 두 아들 모두를 앞세워 하늘나라로 보낸 그는 외로운 영웅이었다.
그래도 환갑 즈음에 이인복이란 여인을 만났다. 빨치산이었던 남편과 하나 뿐인 딸을 잃고 외손녀와 살고 있던 그녀는 서로 의지하며 평온한 말년을 보낸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동지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평생을 항일 무장 투쟁으로 살아온 홍범도 장군. 중국이나 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언제가는 태어나 자란 내 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조국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야속한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전설의 영웅 홍범도. 2년 뒤 조국은 주권을 되찾았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이역만리 먼 곳에서 동쪽 끝 어딘가에 있는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평생 가난했지만 정의로웠고 외로웠지만 뜨거웠던 ‘날으는 홍범도 장군’이 하루 빨리 조국으로 돌아오길 소망한다.

*본 게시글은 홍범도 기념사업회( http://www.hongbumdo.org )에서 제공한 글입니다. 복사/사용 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