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範 圖
홍범도자료실
영상자료
총 94건
영상한국사 I 193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다
-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 광복군이 창설된다. 서로군정서 독립군 사령관 지청천이 총사령관에, 북로군정서 독립군 연성대장 이범석은 참모장에 임명됐다. 1942년에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도 합류했다. 광복군은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중국 각지에서 항일전쟁을 치렀다. 1943년 8월에는 영국군에 협력해 인도와 미얀마 등지에서 대일전쟁을 했다. 1944년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40여 명의 학병이 광복군에 자진 입대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비밀훈련이 시작됐다.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광복군의 한반도 침투를 위한 훈련이었다. 1945년 8월 7일, 미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밀작전개시를 선언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만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 속에 해방정국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엔 자주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광복군이 있었다. ※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 현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전신으로 전략정보국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대#광복군 #창설#지청천 #총사령관#이범석 #참모장#독수리 #작전
영상한국사 I 192 조선의용대, 화베이 지역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 화베이의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소탕전에 밀려 주둔지를 원터우디촌으로 옮긴 상태였다. 후찌아쫘우앙촌에서의 전투로 일부 전력을 상실하고 다시 일본군에 쫓기는 신세였으나 기상은 여전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항일전투를 독려하고 조선의용대 지원자를 모집했다.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고발하는 선전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중국에서 유일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있던 팔로군의 거점을 주시해온 일본군은 1942년 2월부터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인다. 조선의용대의 주둔지인 원터우디촌도 안전하지 못했다.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쫓겨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들어왔다. 반소탕전이 절정에 이른 1942년 5월, 일본군은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해 총공세를 펼쳤다. 의용대원들은 급히 화위산 계곡으로 몸을 피한다. 이 때 함께 피신하던 의용대원들과 갈라져 도망치던 윤세주가 일본군에게 적발돼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대원들의 도움으로 인근 동굴에 피신한 그는 동료들의 안전을 걱정해 혼자 남게 된다. 조선의용대의 정치부장이자 최고의 이론가로 김원봉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충칭에 남은 김원봉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던 윤세주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숨을 거뒀다. 이날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총공세로 윤세주 외에 10여 명의 지도부를 잃는다. #화베이#조선의용대 #일본군과격전#김원봉측근 #윤세주전사
영상한국사 I 190 조선의용대, 항일무장투쟁의 재개를 알리다
- 민족제일과 독립제일이라는 두 개의 구호 아래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후난과 장시, 안후이와 뤄양 등 중국 남부지방에서 활동했다. 김원봉은 10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끄는 총대장직을 맡았고, 핵심대원도 그가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모두 실전과 이론에 능한 엘리트들이었다. 조선의용대의 결성은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그 명맥이 끊겼던 항일무장투쟁의 재개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한연합전선을 통해 중일전쟁의 승리와 나아가서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기치를 내걸었던 조선의용대는 전투보다는 대적선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중국유학생 출신의 엘리트들이 많았던 조선의용대원 대부분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중국군과 의사소통이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일본어가 유창했다. 때문에 선전문을 써서 살포하고 적진을 교란시키는 선전 활동이 가능했다. 그것은 당시 중국군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 능력을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는 이후, 일본군 심문과 첩보, 암살, 파괴 등 비밀작전에도 투입됐다. 100여 명으로 출발한 조선의용대는 설립 1년 만에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영상한국사 I 182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당시 현장 동영상
-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자리에 1만 여명의 인파가 모였다. 일본군의 사열과 기마부대까지 등장한 행사 중간에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이 터졌다. 아수라장이 된 당시 현장 모습이 흑백필름에 생생하게 담겼다. #상하이 #홍커우공원#윤봉길#물통폭탄투척
영상한국사 I 180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 이봉창 의거 후 김구를 찾는 청년들이 많아졌다. 그중에는 홍커우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윤봉길도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 1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자리였다.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과 언론인들도 초대됐다. 일본인으로 위장한 윤봉길은 사전 답사 때 점찍어둔 곳에 자리를 잡았다. 11시 40분,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관과 거류민 단장이 즉사하고, 수많은 일본군 요인들이 다쳤다. 윤봉길은 도망치지 않았고,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광분한 일본군은 한인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들이 속출하자 김구는 진실을 밝히기로 한다. 외신을 통해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의 진상과 한인애국단의 정체를 알리고 이 모든 걸 자신이 주도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얼마 후, 상하이 모든 거리에 현상수배 전단이 나붙고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들었다.
영상한국사 I 179 윤봉길, 일왕 생일 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지다
-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상해사변 승리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군 1만여 명이 모였다. 윤봉길이 던진 물통폭탄은 단상에 명중했다. 일제 침략전쟁의 선봉 시라카와 요시노리 총사령관이 폭사했고, 우에다 겐키치 육군준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준장,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공사 등이 크게 부상을 당했다. 불과 스물다섯 살이었던 윤봉길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후 장제스는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감격스러워했고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을 수용해 장교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1932년 5월 25일, 일본은 윤봉길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같은해 12월 19일, 윤봉길 의사가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에 암매장된 지 14년 만인 1946년에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겼다.
영상한국사 I 178 이봉창, 김구를 찾아가 일왕 제거를 모의하다
- 1931년, 중국 침략의 명분을 찾던 일본은 길림성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수로 문제를 두고 분쟁을 부추긴다. 분쟁은 유혈사태로 이어지는데 이를 만보산사건이라고 한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3개월 만에 만주를 점령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반한감정이 극에 달한다. 김구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때를 기다리던 김구에게 이봉창이 찾아와 일왕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김구는 1년 동안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한다. 폭탄 두 개가 마련됐다. 하나는 일왕 제거용이고 하나는 자살용이었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스스로 작성한 선서문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1932년 1월 8일, 황궁 출입문과 국회, 법무성, 경시청으로 둘러싸인 도쿄의 심장부에 폭탄이 터졌다. 신년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일왕에게 이봉창이 던진 것이다. 일왕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일본 신문은 호외를 발행하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수상부터 모든 각료들이 총사퇴한다. 일본은 비밀재판을 통해 이봉창에게 전격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한 달 뒤인 1932년 10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이봉창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영상한국사 I 177 의열항쟁의 변화 - 김원봉과 의열단원의 중국 황푸군관학교 입학
- 1925년 가을, 김원봉은 의열단을 이끌고 광저우로 이동한다. 손문이 주도하는 국민혁명의 거점이자 동북아정치의 중심지였던 광저우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새로운 활동무대가 됐다. 조직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광저우에서 김원봉과 20여명의 의열단원들이 선택한 것은 황푸군관학교 입학이었다. 김원봉은 개인적인 암살파괴 투쟁에 그쳤던 의열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직적인 투쟁방법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황푸군관학교에서 얻은 것은 단순한 군사지식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사상을 학습했고 공산주의 혁명이론 등 진보적인 사상도 접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원들은 강인한 독립운동 지도자로 단련됐다. 다양한 인맥을 형성해 향후 독립운동의 지원군을 얻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김원봉은 당시 교장이었던 군부의 장제스, 정치부 교관이었던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등 중국 정계의 주요 인물들과 친분을 쌓는다.